실체도 분명치 않은, 질병도 질병같지 않은 만성피로증후군이 현대인들을 괴롭히고 있다.

만성피로증후군에 대한 대표적인 이야기가 있다. 2차대전 당시 미군 폭격기 조종사 루이스 잠페리니가 일본군에 포로가 돼 지낸 고난의 시간을 증언으로 저술한 베스트셀러 ‘언브로큰(영화 시비스

킷)’의 저자 로라 힐렌브랜드(43)는 1987년 만성피로증후군의 실체를 세상에 가장 정확히 알리면서 이 증후군의 대변인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대학 시절부터 원인 불명의 만성피로증후군으로 고통받던 그녀는 2003년 뉴요커 잡지에 기고한 에세이에서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자세히 묘사했다. 관절통과 인후통, 어지럼증, 피로 등으로 고통 받던 그녀는 원인을 찾으려고 병원이란 병원은 다 찾아다녔지만 이렇다 할 진단을 받지 못했고, 병도 아닌 걸로 괜히 유난 떤다는 의사들의 눈총만 받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만성피로증후군과의 싸움이 계속됐다. 오랫동안 이 증후군으로 고통 받던 그녀는 감각이 둔해지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글자들은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눈앞에서 사라졌으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알기 힘들 만큼 정신이 몽롱해졌다. 투명한 막이 내 몸을 감싼 듯 세상을 저 멀리에서 지켜보는 느낌이었다’고 이 증후군의 증상을 호소했다.

규명되지 않은 불확실 질환

수십 년 동안 만성피로증후군은 의학이나 과학으로 규명되지 않는 불확실함에 싸여 있었다. 힐렌브랜드가 처음 증상을 호소한 1987년 이후 무려 400만 명의 미국인에게 고통을 주는 이 병에 의사들이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각종 연구와 가설이 쏟아졌다. 그러나 연구가 진전을 보일 때마다 상반되는 결과가 다시 발표되는 등 혼란이 이어졌고, 이 같은 양상은 최근까지도 반복된다.

예를 들어, 2010년 8월 미 국립보건연구소(NIH)와 식품의약국(FDA) 연구팀은 만성피로증후군 환자의 혈액에서 레트로바이러스군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치료법 개발을 간절히 기다리던 환자들에게 큰 지지를 받은 2009년의 연구 결과를 뒷받침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실시한 세 번째 대규모 연구에선 해당 바이러스와 질병의 상관관계가 발견되지 않았다.

미국내 만성피로증후군 환자들은 이 증후군이 처음 논의되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의사들의 의심 어린 눈총을 견뎌내야 했다. 의사들 또한 아직까지 확실한 원인이나 진단법, 치료법이 없는 각종 증상을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다.

결국 힐렌브랜드를 포함한 많은 환자가 정신과 치료를 받는 수순을 밟았다. 뿐만 아니라 만성피로증후군은 수년간 미국 보건의료당국의 관심을 끌지도 못했다. 1999년 정부 감사 결과 CDC가 만성피로증후군으로 책정된 예산을 다른 연구 프로그램에 전용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을 정도였다.

또한, 만성피로증후군이 너무 복잡한 점도 의료계를 당황케 했다. 증상은 하나의 질환으로 묶기 힘들 정도로 광범위했고, 환자들 사이에서는 이렇다 할 공통점이 없었다. 주중에는 증상이 경미했다가 주말에 갑자기 쓰러지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아예 몸져누운 중증 환자도 있었다. “만성피로증후군은 환자의 인생에서 사형까지는 아니더라도 종신형 선고나 다름없다”고 만성피로증후군 연구를 지원하고 알리는 데 앞장서 온 전미 만성피로-면역기능이상증후군협회 킴 맥클리어리 회장이 말했다. “환자들이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한다.”고 호소한 것이다.

 레토로 바이러스說 입증 못해

이러한 상황에서 네바다 리노에 위치한 휘트모어 피터슨 연구소(WPI)의 주디 미코비츠 연구팀은 최근 전염성 레트로바이러스 XMRV가 만성피로증후군으로 고통받는 환자 67%의 혈액에서 발견됐다고 발표, 2010년 NIH의 연구를 뒷받침했다. NIH는 환자 87%의 혈액에서 XMRV와 연관된 바이러스 DNA가 발견됐다고 했다. 반면, 대조군으로 선택된 건강한 참여자 중에서 해당 바이러스가 발견된 경우는 7%밖에 없었다.

그러나 CDC 보고서나 다른 유럽 연구에서는 어떤 연관성도 발견되지 않았다. 연구마다 결과가 상반되는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애초에 XMRV에 감염되는 이유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관해 아직 밝혀진 사실이 없고 발견된 바이러스가 실제로 만성피로증후군의 원인이 되는지조차 확실치 않다고 연구진은 강조한다. 발병 후 증상으로 바이러스에 감염됐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바이러스를 통한 질병의 전염 가능성은 분명 우려할 만한 사항으로 지목받고 있다.

이같은 연구 결과 발표 후 국제혈액은행협회는 바이러스 전염 가능성을 이유로 만성피로증후군 환자의 헌혈 제한 방침을 전달하기도 했다. 미 적십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성피로증후군이나 XMRV 감염으로 진단받은 사람의 헌혈을 무기한 연기한다는 결정을 내린 바도 있다.

피로는 무엇인가?

피로는 정신적, 신체적, 사회적 요인 등 다양한 측면이 있어서 의학적으로 간단하게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지치고 피곤하여 힘을 쓰거나 일을 수행할 수 없음을 느끼는 상태’로 정의할 수 있다.

이같은 상태는 근육의 사용으로 에너지가 고갈돼 초래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다기 보다, 통증・불안・공포 또는 싫증이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이때는 보통 근육 기능은 손상되지 않는다.

노동만이 피로의 원인이라 생각하던 시대도 있었지만 노동자의 자각적인 피로감과 노동량 사이의 연관성을 밝히는 데 실패한 이후 노동 중 산소와 포도당이 소모되고 이산화탄소와 요산 같은 노폐물이 생성된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노폐물이 고농도로 존재하는 신체상태가 곧 피로라는 이론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러한 연구들은 힘의 사용과 음식물의 산화에 대한 증거, 에너지 전환체계로서의 인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에너지 전환과정과 노동 간의 관계 등을 분명히 입증했다.

그러나 신체 내에서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고갈되어서가 아닌, 활동을 계속할 수 없다는 자기평가 때문에 활동이 중단될 수도 있다는 주장도 대두됐다. 이러한 변화가 심리적인 요소에서 기인했을 때 생물의 물리적・활동적 상태와 전혀 무관한 정신적 요소를 거론하려 하지만 피로에 대한 올바른 정의는 물리적・정신적(심리적) 요소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는 개념이 일반화되고 있다.

따라서 피로에 대한 통합된 단일 개념을 얻기 위해 사고・지각・감정 등 고도의 정신적 과정이 신체의 물리적 과정에서 비롯되는지의 여부를 밝히려는 쪽으로 노력이 기우려지고 있다.

복잡 다양한 피로 원인

피로는 대게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활동뿐만 아니라 뚜렷한 근육의 무리 없이도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이때 노동에 의한 피로처럼 근육에 축적된 노폐물의 양과 상관없이 더 이상 일을 수행할 수 없게 되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근육을 사용하는 것은 심장이나 뇌와 같은 조직의 사용과 달리 복잡한 생화학적 변화를 초래하며 그 결과 거의 대부분 근육의 경직 등 2차적인 결과가 나타나고 통증과 불쾌감 같은 더 높은 수준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하지만 뇌가 영향을 받아 지각 및 태도에 대한 인식능력이 저하되면, 피로감 없이도 행동에 뚜렷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자기평가 능력이 둔화되기 때문에 쇠약감이나 피곤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이와 달리 생리적 장애의 결과로 피로감을 느끼지 못하는 현상을 일부의 저산소증 상황에서 볼 수 있다. 공중에서 갑자기 산꼭대기에 내려졌을 때처럼 대기 중 산소압이 갑작스럽게 감소하는 경우의 피로감은 산을 오를 때처럼 산소의 감소가 점진적이고 운동이 동반될 때 보다 훨씬 더 잘 나타난다.

지속성과 만성피로

피로는 기간에 따라서 분류하기도 한다. 1개월 이상 지속되면 ‘지속성 피로’라고 하고, 그 중 원인에 관계없이 6개월 이상 지속되거나 반복되는 피로를 ‘만성피로’라고 한다. 만성피로 중에서도 만성피로증후군은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지만 비교적 젊은 여성에게서 더 잘 생긴다.

아직 국내에서는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미국과 유럽에서는 인구의 0.2~0.6% 정도의 환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최근에 점점 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일부 병원을 중심으로 한 조사에서 0.3% 정도의 유병률이 보고된 적이 있다. 병원 방문 환자를 대상으로 조사했기 때문에 실제보다 조금 높게 나온 것으로 보인다. 외국 조사에 따르면 아시아인들에서는 유럽인들에 비해 만성피로증후군의 발생률이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병리적인 피로는 신체질환이 있을 때 그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데 빈혈, 간질환, 당뇨병, 갑상선 질환, 신장질환, 폐결핵, 바이러스성 간염, 만성 폐질환 및 심장질환, 류마티스성 질환, 각종 악성종양(암), 여러 염증성 질환, 수면 무호흡증 등이 원인 질환이 될 수 있다.

뚜렷한 원인 질환이 없음에도 피곤한 경우는 장기간에 걸친 정신적인 갈등이나 불안, 초조 및 일상생활에서의 스트레스가 주원인이 된다.

이 밖에도 복용중인 약물(일부 고혈압제, 진정제, 항히스타민제 등), 음주, 흡연, 운동부족, 비만도 피로의 중요한 원인일 수 있다.

누구나 겪는 춘곤증

봄에 자주 겪게 되는 나른함, 졸음, 식욕부진, 소화불량 등 ‘춘곤증’은 생리적인 피로의 일종으로 겨

우내 움츠리고 위축되었던 몸과 마음이 변화된 온도나 습도 등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해 일어나는 현상이다. 생리작용 기전으로 볼 때 목욕한 뒤에 느끼는 나른함과 비슷하게 설명된다. 즉, 신체 외부환경의 기온과 습도가 올라가면 그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 몸의 말초혈관이 확장돼 혈액이 피부에 집중적으로 순환이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반면, 내부 장기의 혈액순환은 상대적으로 감소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혈압의 일시적 감소, 현기증, 소화액의 분비감소로 인한 소화불량 등 마치 여러 장기별 질환과 유사한 피로의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인체는 이러한 환경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마간의 적응기간 이후에는 정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피로가 점점 심해지거나 혹은 회복되지 않거나 체중변화, 수면장애, 피부 창백, 황달 등 다른 전신증세를 동반한다면 잠재적인 피로 원인들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우선 피로감을 느낄 때 자신의 일상생활 가운데 피로를 유발할 수 있는 요인이 있는지를 잘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즉, 무언가 일상생활의 새로운 변화가 원인으로 생각된다면 그 변화에 얼마나 잘 적응하고 있는지를 따져보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부담감이나 적대감을 버리고 긍정적으로 생각, 마음을 최대한 편안히 갖는 것이 중요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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