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약품·유한양행, 국내 제약사로는 유일하게 독립운동 참여
의사, 경성의전 학생 20% 구금…임시정부서 항일운동 이어가
약사, 3.1 운동·의열단·비밀결사대 조직 등 전방위로 활동

▲ 게티이미지뱅크 사진 제공

1919년 3월 1일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알린 역사적인 날이다. 3.1 운동 102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에 보건의약산업계의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해 봤다.

≫ 제약사, 약 팔아 ‘독립운동 자금’ 대

국내 제약사 중에서는 유일하게 동화약품과 유한양행만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897년 창업한 국내 최초 제약사인 동화약품은 ‘생명을 살리는 물’ ‘활명수’(活命水)를 만들어 민족을 살리는데 기여했다.

동화약품의 전신인 동화약방의 민강 사장은 1919년 3.1 운동 직후 체계화된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 간 비밀연락망인 ‘서울연통부’를 운영하고, 활명수를 판 자금으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이다.

일제의 감시로 돈을 전달하기 어려울 때는 활명수를 직접 중국으로 보내고 이를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당시 활명수 한 병은 50전으로, 설렁탕 두 그릇에 막걸리 한 말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고가였다고 한다.

약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대던 민강 사장은 임시정부에 발송할 비밀문서를 목판에 새기다 발각되는 등의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로 인해 건강이 악화된 민 사장은 1931년 4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동화약품은 또 1936년 손기정 등 우리나라 선수들이 독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따내자 ‘건강한 조선을 목표로 하자’는 축하 광고를 일간지에 게재하며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런 정신은 꾸준히 이어져 동화약품의 5대 사장인 윤창식 선생은 민족 경제 자립을 목표로 하는 ‘조선산직장려계’, ‘신간회’ 등을 지원했고, 7대 사장인 윤광열 명예회장은 주호지대 광복군 5중대 중대장직을 수행하는 등 동화약품의 독립운동은 지속됐다.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기업가로 잘 알려진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도 독립운동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유일한 박사는 14세였던 1909년 독립군 양성을 위해 미국에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에 입학한 이래 꾸준히 독립운동에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졌다.

1926년에는 일제 식민치하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민족의 현실을 보고 ‘건강한 국민만이 잃었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또, 1941년에는 독립운동가 김호 선생과 함께 민족지도자들을 모아 맹호군을 창설하고, 미국 전략정보처 OSS(현 CIA 전신)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참여해 독립에 기여하고자 했다.

특히, 1945년에는 5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반일 민족의식이 투철한 재미한인을 선발해 한국과 일본에 침투시켜 적 후방을 교란하는 ‘냅코(NAPKO) 작전계획’에 참여해 특수훈련을 받기도 했다. 유 박사는 1946년 미국서 귀국한 뒤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민족경제 발전에 이바지했다.

≫ 나라 살리는 의사(義士)가 된, 사람 살리는 의사(醫師)들

‘의사’는 사회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는 대표적인 직업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시대 수많은 의사들은 나라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헌신했다.

대표적인 의사 독립운동가로는 서재필, 김필순, 이태준 등이 있다.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창립했다고 알려진 서재필 의사는 미국 조지워싱턴대 의학부를 졸업한 의사다.

그는 3・1 운동 후 독립운동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병원과 문방구점 등 재산을 처분하기도 했다. 그 금액만 7만6,000달러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결국 서재필 의사는 1926년 무일푼의 처지가 되기도 했다.

제중원의학교를 졸업한 김필순 의사는 만주와 내몽고 지역에서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08년 제중원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했는데 도산 안창호와 결의형제를 맺고 1907년 신민회가 조직될 때 회원이 되었으며, 1900년대 세브란스병원에 재직하면서 자신의 집을 독립운동가들의 협의 장소로 제공했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해 이동녕, 전병현 등과 함께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힘썼으며, 내몽고 치치하얼에 수십만 평의 토지를 매입, 100여 호의 한인들을 이주시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의 후방 기지로 개척했다.

그는 의업을 하면서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중 1919년 9월 1일 일본인 의사가 건네준 우유를 먹고 순국했다.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한 이태준 의사는 몽골지역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했고 신민회 자매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김규식과 함께 몽골로 가서 독립운동의 연락거점이자 군자금 유통경로인 병원 ‘동의의국’을 개설했다. 몽골에 만연한 전염병을 치료해 몽골 황제의 주치의로도 활약했다.

특히 1919년에는 의학전문학교 학생들도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대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김상태 교수에 따르면, 1919년 3월 1일 당시 종교계 대표들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때 학생들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동시에 시민들과 함께 종로, 덕수궁 앞 도심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3월 5일에는 남대문역 등지에서 학생들이 독자적으로 제2차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일본 헌병과 경찰은 저녁 무렵부터 시위 진압을 시작해 3.1운동에 참여했던 학생 상당수가 재판에 회부됐는데, 관립전문학교 중에서도 의학전문학교에서 참여한 학생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중에서도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이 210명(학생 164명) 중 32명으로 가장 많았다.

당시 3.1운동 참가로 경성의전 학생 20% 이상이 구금됐고, 79명이 퇴학 처리됐다. 이들은 후에 일제의 횡포에 맞서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 약사, '비밀결사' 조직까지 만들어 독립운동 전개

약사들 역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기록에 따르면 3.1 운동 당시 조선약학교 학생들 대부분이 참여했다. 이들은 탑골공원을 시작으로 무교동 대한문 등을 행진했다.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고향으로 피신해 각 고향에서 독립 시위를 도모하며 3.1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기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약사의 이름은 의열단 명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3.1 운동 후 무장투쟁 필요성을 느낀 독립운동가들은 의열단을 구성했는데, 윤충식, 신병환 등이 약사로서 의열단 명단에 이름이 남아있는 것이다.

특히, 1930년 조선약학교가 경성약학전문학교로 승격돼 개교했지만 일본 교수의 차별과 일본인 학생에 대한 우대는 여전했다.

이에 한국인 학생들은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축구부를 만들었고, 이 안에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들은 교내에서 비밀리에 단체 활동을 하면서 조선을 일본제국의 굴레로부터 독립시켜 옛날의 굴욕을 보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민족적으로 일치단결해 내지인에 대해 의식적으로 대항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이 같은 회합은 1941년 10월경 일제 경찰에 발각돼 축구부원 14명이 취조를 받았다. 이들 대부분은 1942년 7월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유예 처분과 보호관찰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비밀결사 조직원 중 한 명이었던 김철용은 이후 한국인 친구에게 내선일체(內鮮一體)는 거짓이라고 하면서, 배속장교와 생도주사를 통해 일본어 사용을 강제하는 등의 일제의 압박정치를 비난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 발각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의 판결을 받고, 일제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기도 했다.

또 다른 조직원이었던 오상흠은 1941년 경성약전을 졸업하고 유한양행에서 근무하던 중 1944년 회사 동료인 정문규로부터 독립운동에 사용할 폭탄제조를 의뢰받았으나 이는 결국 발각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1945년 7월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으나 광복으로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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