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사안 다른 결과’…왜곡·작성의무 누락 ‘얼룩진’ 감정서
경실련, 중재원 상근감정위원 ‘고발’…“의사 위한 기관이었나”
과거 부조리 폭로도 잇따라,“선 서명, 후 감정…백지 서명 먼저”
복지부, “중재원에 보고 요청…사실 관계 파악 후 대책 마련할 것”

▲ 게티이미지뱅크 사진 제공
▲ 게티이미지뱅크 사진 제공

의료분쟁을 공정하게 해결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공정성 문제에 휘말렸다. 이 곳에서 일하는 일부 위원들이 감정 내용을 왜곡하거나 소수의견 작성 의무를 누락했다는 지적이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와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은 이 같은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며 사실 관계 파악 후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지난 18일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중재원) 전직 상임감정위원 3명을 업무방해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은 지난 2012년 의료과실 피해자의 권익 보호와 의료 소송에 따른 경제 부담을 줄이고, 의료인에게도 안정적인 진료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설립됐다.

중재원의 고유 업무는 조정 및 중재를 담당하는 의료분쟁조정위원회와 의료사고감정단으로 나뉘어져 운영하고 있다.

의료사고 피해자가 중재원에 조정·중재를 신청하면 원장은 의료분쟁조정위원회와 의료사고감정단에 각각 이를 통지하고 사건을 조정부와 감정부에 배당한다.

 

▲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조직도(제공: 경실련)
▲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조직도(제공: 경실련)

의료사고감정단은 1~10개의 감정부로 나뉘어지며 일반적으로 각 감정부마다 상임감정위원 1인과 비상임감정위원 4인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분쟁 해결에 필요한 사실조사, 과실 및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상임감정위원은 의사의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서 중재원에 상근하며, 각 감정부에 배당된 사건들에 대해 의학적인 감정 결과를 최종적으로 ‘감정서’의 형태로 작성한다.

비상임감정위원은 ▲전문의·치과의사·한의사 등 의사 1명 ▲검사·변호사의 자격이 있는 자 2명 ▲소비자 권익 대표 자 1명 등 5명으로 구성된다.

이들 감정위원은 감정부 회의를 열어 사건 기록을 검토한 결과를 종합해 만장일치로 ‘감정서’를 작성하는데, 의료분쟁조정위원회는 이 감정서를 기초로 조정기일을 진행한다.

문제는 최종 감정서를 작성하는 상임감정위원의 역할이 크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감정부는 의사인 상임감정위원 1인을 중심으로 비상임위원 4인 중 2인 이상만 출석하면 회의 개최가 성립된다. 비상임감정위원 중 검사도 있지만 본연의 업무가 과중하다는 이유로 거의 출석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각 감정위원은 회의가 열리기 전 기록을 검토한 후 감정부 회의에 출석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지만 감정서는 주로 ‘상임감정위원’이 최종 작성한다.

이 과정에서 상임감정위원이 최종감정서에 감정 내용을 왜곡하거나 소수의견 작성 의무를 누락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는 것.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의료분쟁조정법) 제29조 4항에 따르면 감정결과를 의결함에 있어 감정위원의 감정소견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감정서에 소수의견도 함께 기재해야 한다.

하지만 중재원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 동안 감정서에 소수의견이 기재된 건은 작성된 감정서 총 7,968건 중 32건으로 0.4%에 불과했다.

소수의견 누락으로 조정업무를 방해했다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 게티이미지뱅크 사진 제공
▲ 게티이미지뱅크 사진 제공

≫ 회의에선 과실, 감정서엔 이상무…‘같은 문제, 다른 결과’

<메디코파마뉴스> 취재 결과, 실제로 일부 상임감정위원이 감정소견서의 내용과 다르게 하거나 소수의견을 누락한 채 감정서를 작성한 사실이 드러났다.

실제로 허리통증 진료 환자가 척추고정술을 받고 무산소성 뇌손상에 빠진 사례를 보면, 당초 이 환자의 감정소견서에는 ‘수술 전 협진 및 위험성 평가를 시행하지 않은 과실’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최종 감정서에는 ‘협진 시행해 수술 전 위험성 평가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기재됐다.

A씨의 아버지 사례도 마찬가지다. A씨의 아버지는 지난 2017년 Z병원에서 담관염 진단 및 치료를 받고 퇴원한 후 가슴통증을 동반한 복통을 호소해 같은 병원에 다시 내원했다. 검사 결과 급성담낭염이 관찰됐다.

이에 대해 감정소견서에는 ‘퇴원 전 담낭염을 의심하고 조치하지 않은 과실’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최종 감정서에는 담낭염 진단 지연 및 조치 미흡에 대한 언급은 빠진 채 ‘치료와 인과관계가 없다’는 모호한 결론을 내렸다.

A씨는 이에 불복해 재감정을 신청하고 외부 의료인 자문위원에게도 감정을 요청했다. 하지만 결과는 1차 감정과 똑같았다. 감정소견서에서는 ‘감정위원과 의료인 자문위원이 담낭염에 대한 추가 검사가 없었던 점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으나 최종 감정서에서는 이 같은 의견은 누락된 채 ‘담낭염의 의심 가능성이 낮다’는 취지로 기록됐다.

상임정감위원의 전횡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 사진 설명=경실련은 지난 18일 ‘중재원 상임감정위원 고발 기자회견’을 열고, 의료감정 과정에서 과실을 누락·조작해 중재원의 업무를 방해한 일부 상임감정위원을 고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 사진 설명=경실련은 지난 18일 ‘중재원 상임감정위원 고발 기자회견’을 열고, 의료감정 과정에서 과실을 누락·조작해 중재원의 업무를 방해한 일부 상임감정위원을 고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 ‘선 결론, 후 회의’ 충격…민낯 드러낸 의료분쟁중재원

시민단체에서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는 분위기다.

경실련은 18일 ‘중재원 상임감정위원 고발 기자회견’을 열고, 의료감정 과정에서 과실을 누락·조작해 중재원의 업무를 방해한 일부 상임감정위원을 형법 제314조에 의한 업무방해 혐의로 고발했다고 밝혔다.

남은경 경실련 사회정책국장은 “국회를 통해 다수의 감정소견서와 최종 감정서, 감정부 회의록을 확보했다”며 “최종 감정서에 소수의견 누락이나 회의 결과와 반대 사실을 적시하는 등 범죄 사실이 드러난 사건에 대해 고발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부 특정인의 일탈행위로 간주하기에는 조정원의 시스템이 너무나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고 공정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다”며 “의료분쟁조정법 제정 후 감정에 대한 우려가 컸는데 이번에 그 실체가 드러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번 사례는 빙산의 일각으로 생각된다”며 “중재원이 의사를 비호하는 또 다른 기관으로 전락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과거 비상임감정위원으로 활동했던 변호사들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당시 부조리함을 낱낱이 고발하기도 했다.

송기민 경실련 보건의료위원은 “위원들은 감정부 회의 3주 전에 자료를 받고 미리 감정소견서를 메일로 제출하기 때문에 내용을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회의를 시작한다”며 “결국 상임위원이 의도한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제는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감정 결과를 내야 한다는 점”이라며 “의견이 평행선을 달리면 상임위원은 의료과실로 해줄 수 없으니 설명의무 미흡 위반으로 대신하자는 절충안을 제시한다. 소수의견도 받아줄 수 없다고 한다”고 폭로했다.

또 “회의에 참석했던 위원들의 서명을 백지에 먼저 받기도 한다. 선 서명 후 최종 감정서를 작성하는 것”며 “합의됐던 내용이 감정서에 어떻게 작성됐는지 다른 위원들에게 보여주질 않아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 이는 중재원 감정의 공정성에 치명적인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절차”라고 지적했다.

이어 “과실이 의심되는 건으로 항의하며 소수의견 게재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서명을 거부한 적이 있었다”며 “추후 연락이 없어 확인해 보니 다른 위원으로 대체해 통과시킨적이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공개했다.

≫ 복지부, “중재원에 보고 요청…사실 관계 파악 후 대책 마련할 것”

상황이 이런 만큼 제도 개선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앞서의 송기민 보건의료위원은 “의료인은 의료 자문에만 한정할 필요가 있다. 의료인의 평가가 감정 결과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상당히 불합리한 구조”라며 “비상임위원 중 소비자권익위원과 법조인이 참여한 것은 피해자 측을 대변하기 위함이다. 이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임위원으로 활동했던 신현호 변호사도 “현행 의료분쟁조정법에는 감정 과정에서 나오는 전문가들의 소견은 모두 최종 감정서에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은경 국장 역시 “경실련은 경찰 고발과 함께 향후 중재원의 불법 감정에 대한 감사원 감사청구를 제기할 것”이라며 “그간 진행된 감정 결과에 대한 전수조사 및 재발 방지를 위한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을 촉구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사실관계 파악 후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보건복지부 의료기관정책과 관계자는 18일 <메디코파마뉴스>와의 통화에서 “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당시 사건 개요와 문제점을 파악해 보고해달라고 했다”며 “상황을 파악한 후 대응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의료분쟁조정중재원 역시 현재 대응책 마련에 고심 중이다.

중재원 관계자는 본지 취재진과의 통화에서 “감정서는 의료기록 등 개인정보가 모여 있는 만큼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관련 팀만 접근할 수 있다”며 “중재원에서도 접근이 어려운 만큼 사실 관계를 파악 중이다. 이후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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