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 뇌성마비 신생아 분만 산부인과 의사에게 12억 배상 판결
산부인과학, 불가항력적 상황 의료사고 배상 정부 책임 ‘촉구’
산부인과의 “이번 판결로 산부인과 의사 분만 현장 떠나고 있어”
직선제 산의회, 분만의 위축 및 재정난 야기…인프라 붕괴할 것

유토이미지
유토이미지

[메디코파마뉴스=박애자 기자] 사법부가 늦장 대처로 신생아에게 뇌성마비 장애를 입혔다며 산부인과 의사에게 12억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하면서 의료계가 발칵 뒤집혔다. 의료계는 불가항력적 상황에서 발생한 의료사고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배상하라는 이번 판결은 산부인과 의사들의 분만 현장 이탈을 부추겨 분만 인프라 붕괴를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수원지방법원 평택지원 1민사부(부장 박병찬)는 지난 5월 4일 신생아 뇌성마비 책임을 물어 분만의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한 소송에서 환자와 가족에게 12억5,552만2,190원과 지연 이자를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지난 2016년 11월 유도분만 예정일 하루 전 태동이 약하다고 느낀 A씨는 태동검사(non-stress test, NST)를 받기 위해 B병원을 내원해 태동 확인과 NST를 진행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이날 A씨가 의료기관에 내원해 입원한 시간은 오후 11시 30분경인데 B병원 의료진이 태아곤란증 상황을 인지한 것은 약 1시간 40분이 지난 다음 날 새벽 1시 무렵이었다. 분만을 진행한 산부인과 전문의 C씨가 A씨 상태를 직접 확인한 시각은 오전 1시 12분 경이었던 것이다.

이에 C씨는 뒤늦게 응급 제왕절개수술을 실시했지만 태아는 자가 호흡과 심박동이 없는 상태로 태어났다. 결국 대학병원 중환자실로 전원한 태아는 치료받은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뇌손상으로 인한 뇌성마비 장애를 갖게 됐다.

이에 대해 A씨 측은 B병원 의료진이 NST 결과를 실시간으로 확인하지 않는 등 상태 관찰을 소홀히 했고 태아곤란증이 발생하고도 뒤늦게 분만해 적시에 적절한 조치를 못 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법원은 A씨의 주장을 받아들여 C씨의 과실을 인정했다.

법원은 “A씨가 내원한 직후 간호사가 아닌 의료진이 직접 진료해 태동 감소 여부와 정도를 확인했다면 태동이 감소하게 된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추가 검사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라며 “추가 검사를 통해 태아곤란증 등의 이상상황을 더 빨리 발견해 그에 따른 조치도 적시에 취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이어 “C씨가 내원 즉시 태아곤란증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A씨를 직접 진료하고 태아곤란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조치했어야 한다”며 “산모와 태아 상태를 계속 면밀히 측정·관찰하면서 즉각 대응할 준비를 해야 하는데도 이를 소홀히 했다”고 지적했다.

다만 재판부는 ▲A씨가 B병원에서 출산한 경험이 있어 B병원이 A씨의 분만 과정에서 특별한 이상상황이 발생하리라 예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점 ▲B씨가 분만실에 도착한 이후 일련의 조치는 당시 상황에 비춰 적절하고 신속했던 점 ▲출산 이후 신생아를 소생시키기 위해 노력한 점 등을 고려해 피고의 책임을 70%로 제한했다.

이에 따라 법원은 C씨에게 손해배상금 11억7,152만2,190원에 위자료 8,400만 원을 포함해 12억5,552만2,190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 뿔난 산부인과, 선의에 가혹한 처벌…분만 인프라 붕괴 ‘가속화’

법원의 이 같은 판단에 산부인과 의사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불가항력적인 의료사고임에도 12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지불하라는 판결이 분만 인프라 붕괴를 가속화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대한산부인과학회는 최근 성명을 통해 불가항력적 상황에서 발생한 의료사고에 대한 배상은 정부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산부인과학회는 “분만이라는 의료행위에는 본질적으로 내재된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산모나 태아의 사망 혹은 신생아 뇌성마비 등 환자가 원치 않던 나쁜 결과가 일정 비율로 발생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며 “그러나 태아의 이상을 발견한 즉시 의료인이 선의의 의료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산부인과 의사에게 거액의 배상 책임을 묻고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라고 성토했다.

이어 “이는 지금 이 시간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분만 현장에서 불철주야 애쓰는 많은 산부인과 의사들을 위축시키고 사기를 저하시킨다”며 “저출산 시대의 ‘필수의료 살리기’는 공허한 외침이 되어버리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불가항력적인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재판부의 판결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사명감을 갖고 묵묵히 진료실과 분만실을 오가며 간겅한 생명의 탄생을 위해 헌신해 온 산부인과 의사들을 개탄하게 만들고 있다”며 “이는 결국 의료행위를 중단하게 해 분만 인프라 붕괴라는 재난 상황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산부인과학회는 이를 방지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제도적 장치 마련을 요구했다.

학회는 “선의의 의료행위 후에 발생한 일부 나쁜 결과에 대한 책임은 담당 의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나누어 감당해야 할 몫”이라며 “이에 대한 국가 차원의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도 최근 법원이 간과한 쟁점들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상급심에서의 현명한 판단을 촉구했다.

산부인과의사회가 꼽은 법원이 간과한 4가지 쟁점은 ▲보험금 사건 감정 결과만 증거로 채택한 점 ▲태아곤란증 의심이 가능한 중요한 증거를 간과한 점 ▲대면진료를 하지 않았다고 주의 의무 위반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점 ▲전원조치상 과실 여부 등이다.

산부인과의사회는 “법원이 뇌성마비로 태어난 신생아의 분만을 담당한 산부인과 의사에게 12억 원을 배상하라고 한 판결은 불가항력적인 의료사고에 대해 최선을 다한 산부인과 의사에게 너무 가혹하다”며 “이번 판결로 인해 분만실 산부인과 의사들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안고 분만 현장을 떠나게 될 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분만의 어려움 속에서도 묵묵히 산모와 태아의 건강을 위해 일생을 바쳐온 산부인과 의사들이 더 이상 견뎌야 할 이유는 이번 판결로 인해 사라지고 있다”며 “상급심에서는 법원이 공정하고 현명하게 판단해 달라”고 요구했다.

직선제 산부인과의사회 역시 이번 판결이 분만 인프라를 더욱 열악하게 만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직선제 산부인과의사회에 따르면 2018∼2021년까지 분만의료기관 80곳이 감소했고 이에 따라 전국 250개 시·군·구 중 42%(105곳)는 분만취약지로 분류된다.

직선제 산부인과의사회는 “분만의 낮은 수가와 낮은 출산율로는 분만병원 운영비와 직원 인건비를 유지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라며 “선의의 의료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인해 받게 되는 가혹한 처벌 및 천문학적인 거액의 배상 판결은 많은 분만의를 위축시키고 재정난에 빠지게 해 분만 인프라를 더욱 열악하게 만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번 재판부의 판결은 열악한 환경에서 묵묵히 진료실과 분만실을 지키며 환자와 국민건강을 위해 헌신하는 분만의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에 충분하고 종국적으로 전국의 분만의들로 하여금 가능한 책임질 일이 없는 방어진료나 분만의 중단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저수가로 인해 왜곡될 대로 왜곡되어 있는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에서 고단하게 버티고 있는 의사들에게 정부는 각종 악법을 퍼붓고 있고 사법부는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지 못한 것을 죄로 물어 천문학적인 거액의 배상 판결을 내리고 있다”며 “해당 재판부를 포함한 전국 각급 법원에서 의료분쟁 소송을 진행하는 재판부의 공정하고 합리적인 배상 판결을 내려 줄 것을 부탁한다”고 강조했다.

저작권자 © 메디코파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