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돈 '쏟아부은' 기업…'해묵은 잣대' 들이대는 정부
제네릭 ‘부추기는’ 국내 약가 정책…제약업계 악순환만
“개량신약 약가산정 기준 개선 시급…합리적 정책 마련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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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코파마뉴스=김민지 기자] 우리나라 약가 제도가 국내 제약업계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고 있다. 막대한 돈과 시간을 들여 혁신·개량 신약을 만들어내고도 급여 문턱을 넘지 못하는 일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는 정부가 해묵은 기준을 손보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복제약을 팔아 최소한의 영업이익 만을 남기는 제약업계의 경영 행태는 바뀌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다.

대화제약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경구용 파클리탁셀제제 리포락셀(성분명 파클리탁셀)이 시판 허가를 받은 지 7년이 지났다.

이 약은 당초 개량신약을 목표로 만들어졌지만 국내 급여 등재는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현행 약가 제도가 요구하는 우대 기준이 없다는 이유로 적절한 약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리포락셀이 ‘비운의 국산 개량신약’으로 불리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 약은 세계 최초 경구용 세포독성항암제로 지난 2016년 9월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허가받았다. 리포락셀은 BMS에서 만든 항암제 '탁솔(성분명 파클리탁셀)'의 제형인 주사를 마시는 형태로 변경한 개량신약이다.

앞서 이 주사제의 경우 환자들이 항암치료 과정에서 여러 부작용을 겪었지만 그동안 한정된 제형 탓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던 상황이다. 이렇게 기존 탁솔이 가진 주사제라는 한계를 뛰어넘은 게 경구제로 만들어진 리포락셀인 것.

리포락셀은 지난 1999년 산업자원부의 고효율 항암제 개발사업 과제로 선정되면서 대화제약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기술 개발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정부도 약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80억 원에 달하는 비용을 지원했으며, 회사는 20여년에 걸쳐 200억 원의 비용을 투입해 리포락셀을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리포락셀은 2016년 9월 식약처로부터 복용 편의성과 기술 진보성 등을 인정받아 개량신약으로 허가받았다.

문제는 이 약이 투여경로 변경을 통해 기존 약물보다 복용편의성을 개선하고도 정작 우리나라에는 이에 대한 우대 기준이 없어 급여권 진입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 투여경로 변경한 토종 개량신약, 약가 우대 기준은 ‘실종’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투여경로 변경 개량신약에서 약가산정에 대한 내용은 현재로선 부재한 상태다.

개량신약 산정 기준은 투여경로가 동일한 염 변경 또는 이성체로 개발된 약제, 자료제출의약품 중 새로운 제형으로 허가받은 약제, 자료제출의약품 중 새로운 용법·용량으로 허가받은 약제로 한정돼 있다.

개량신약의 지위를 부여하는 국내 기준이 이렇다 보니, 주사제를 경구제로 업그레이드 하고도 정작 리포락셀은 약가 우대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연출된 것.

앞서 리포락셀은 협상 대상 약제로 구분돼 오리지널과 제네릭을 합한 가중평균가를 기반으로 최저기준의 약가를 산출 받았다.

문제는 심평원이 파클리탁셀 가운데 가장 저렴한 용량인 300mg을 기준으로 약가를 결정하면서 리포락셀은 파클리탁셀 제네릭 중에서도 가장 낮은 약가를 받아들게 됐다는 점이다. 어렵게 개발해낸 개량신약이 기존 제네릭 주사제에도 못 미치는 약가가 산정되면서 결국 리포락셀은 비운의 비급여 약제로 남게 됐다.

≫ 신약 개발 ‘동력 잃은’ 韓 제약사, 해외 시장서 ‘살 길’ 모색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해외에서 살길을 모색하려는 기업들의 사례도 점차 늘고 있다.

한미약품의 경구용 항암제 오락솔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약물 역시 파클리탁셀 제제로, 기존 정맥주사 형태의 항암제를 오라스커버리(ORASCOVERY) 플랫폼 기술을 적용해 먹는 약으로 개발한 제품이다.

회사는 지난 2011년 미국 아테넥스에 오락솔을 기술수출한 뒤 여전히 국내 판권을 쥐고 있다. 다만, 한미약품은 우리나라에서 이 약의 허가 절차는 거치지 않고 있는 상태다.

오락솔의 국내 허가 신청 여부는 해외 임상·허가 진행 상황에 따라 가닥이 잡힐 것으로 보인다.

대화제약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회사는 지난해 9월, 중국 허가당국에 리포락셀의 위암 적응증에 대한 품목허가를 신청해놓고 승인을 대기 중이다. 업계에 따르면 중국 당국은 최근 리포락셀의 신약 품목허가를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화제약은 리포락셀의 적응증 확대도 시도하고 있다. 회사는 유방암을 대상으로 한국·중국·유럽에서 임상 3상을 진행 중이며 미국·체코에서는 2상 결과보고서가 작성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의 두 회사 모두 파클리탁셀 제제를 경구용으로 개발하고도 해외시장을 먼저 공략하는 데는 국내 약가 시스템의 문제가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막대한 시간과 돈을 들여 개량신약을 만들어냈지만 정부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면서 기업들이 새 활로를 모색하는 악순환이 수년째 반복되고 있는 것.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신약을 만들어도 적절한 약가를 받지 못하면 기업 입장에선 돈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 동기부여가 사라지게 된다. 이는 결국 국내 제약기업들에게 제네릭 생산을 부추기는 격”이라며 “더 큰 문제는 제약사들이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리려고 해도 국내 약가 때문에 협상테이블에서 발목이 잡힌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약이 쓰이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외국에서 터무니없는 약가를 받을 수도 없는 일인 만큼 제약사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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